- 2010/11/10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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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11/09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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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설
얼핏, 수필 같다. 작가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보며 떠오른 어릴 적 이야기를 조근조근 건넨다. 심야 라디오 사연처럼 잔잔한 어조로 전개되는 것이 어딘가 모르게 환상적인 느낌마저 든다. “아주 허황된 이야기를 들려드리게 되어 독자에게 미안하다” (p.117)는 소설의 시작은 어쩐지 긴장된다. 명심해야 할 것. 전성태의 「이야기를 돌려드리다」는 어디까지나 소설이다. 수필도 아니고 사연도 아닌, 오묘하고 깊숙한 4차원의 소설.
이러한 소설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는 픽션을 대하는 태도이다. 소설은 항상 내게 있을 법한 이야기를 그럴 듯하게 해대는 가짜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 헷갈린다. 어디까지가 가짜이고,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어디까지가 소설이고, 어디까지가 비소설인지. 하지만 결말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도 가짜가 되고, 가짜도 진짜가 되는 것이 소설의 세계니깐.
2. 기억
본격적인 전개는 작가의 어머니가 나날이 기억을 잃어가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5년 전 치매에 걸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뵌 할머니가 나를 보자마자 “뉘집 처잔고.” 라는 말을 건넸을 때의 당황스러움을, 작가 역시 맞닥뜨린다. "어머니의 기억은 마치 핸드폰 액정화면의 배터리 표시처럼 지워져가고"(p.118), "어머니의 기억이 깊어질수록 소통은 불가능해진다."(p.119) 기억은 한 인간의 동일성을 지켜낼 수 있는 중심과도 같다. 동시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누군가로 자리매김 할 수 있는 힘이다. 그러한 기억이 사라져가는 상대와 마주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람의 존재를 외면하고 만다. ‘치매’라는 병명을 자위삼아, 나 역시 손녀도 못 알아보는 할머니는 우리 할머니가 아니라고 생각했듯이.
그런데 희한하게도 작가의 어머니는 동일성을 유지하는 반응을 보인다. 기억이 소학교 시절을 넘어가는 와중에도, “어머니는 “엄마!”하고 부르면 “오야”하고 대답했고 “밥 좀 줘”하면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p.119) 자식들을 향한 본능 때문이었을까. 어머니를 어머니로서 지키고자 하는 작가는, 나와는 달리 소통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소통의 방식이 독특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억지로 상대의 기억을 끌어와 현재를 인식시키려고 애쓴다. 나를 중심으로 ‘지금의 관계’를 되찾으려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 장면에서 익숙한 대사도 “저 알아보시겠어요?” 이다. 하지만 작가는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관계’ 자체에 무게를 둔다. 그는 어머니의 기억을 억지로 끄집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기억이 머무르고 있는 곳에서 관계를 찾고자 한다. 어머니의 과거 속에도 아들은 존재할 테니까. 그래서 그는 "한 때 속해 있었던 말랑말랑한 세계, 어머니가 물려준 그녀와의 친연성이 있는 세계"(p.120) 속으로 들어간다.
3. 이야기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다른 세계의 구멍 속으로 미끄러지듯, 작가는 ‘이마가 뜨거운 아이’의 시절로 돌아간다. 어릴 적, 어머니는 아들에게 신기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준다. 어머니의 당숙할머니가 잡아 드셨다는 솥 하나만한 산갈치 이야기, 백 년에 한 번씩 눈처럼 피는 대꽃 이야기, 겨울에 나는 수박 이야기. 이 모든 이야기들이 신비스럽고 흥미진진한 옛이야기와도 같다. 그런데, 혼불을 본 작가는 정말로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된다. 꿈에서 동네사람들의 죽음을 예견하게 된 것이다. 그는 자꾸만 꿈에 시달리게 되고, 실제로 사람들은 죽는다. 이제 작가도 어머니처럼 자신만의 신기한 이야기를 갖게 되면서, 이야기에 대한 믿음은 강해진다.
그런데 어머니는 단순히 아들의 재미만을 위해 이야기를 한 것 같지 않다. 실제로 산갈치 박제를 보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아이들보다 더 신기한 눈을 한다. 그녀를 지켜보면서 작가는 "아들에게 들려주느라 허황된 얘기를 들먹였던 게 아니라 당신 자신이 지금껏 산갈치에 들려 살아오지 않았나 하는 느낌"(p.124)을 받는다. 또한, 이야기가 끝나면 어머니는 “신기하지 않니? 그러나 하나도 신기한 얘기들이 아니란다. 내가 하는 얘기들은 모두 사실이니까.”(p.131)라고 말한다. 결국, 어머니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힘은 ‘신기하게끔 잘 지어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있는 것이다. 작가 또한 어머니의 얘기에 효과를 본 것인지, 더 이상 꿈에 시달리지 않게 된다. 그것 또한 작가가 어머니의 이야기를 좋아하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4. 세계
이렇게 까마득해진 옛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작가는 어머니의 기억이 이따금씩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는 “어떤 미동도 없이 먼 세계에 있는 듯싶은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면 한순간 눈이 반짝이는 것 같기도 하였다.”(p.132) 고 느낀다. 그러면서도 어머니가 치매라는 병을 거스르며 기억을 되찾을 거라는 황당무계한 기대 또한 하지 않는다. 그저 어머니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계속 해 나갈 뿐이다. 요양원 침대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어머니와 아들만의 세계를 형성한다. 우리로서는 소설을 통해 엿볼 수만 있는 산갈치 이야기과 대꽃 이야기 같은 세계 속에 그 둘은 함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어머니가 들려준 옛이야기로 어머니와의 소통을 이루어 낸 장면은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아무리 그럴듯한 세계라도 공감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면 빠져들 수 없다. 심지어 현실이라는 세계도 외면하면 ‘사회 부적응’이나, ‘과대망상증’ 같은 병명만 붙게 된다. 그와 같은 원리로 아무리 신비스러운 세계라도 빠져드는 순간, 진짜가 된다. 산타클로스는 아직도 많은 꼬맹이들에게 유효하고, 귀신 이야기는 믿는 사람에겐 그만한 공포가 따로 없다. 이러한 세계에 빠져들기 위해 소설은 4차원을 거쳐 왔다. 어디서부터 진짜 인걸까. 치매에 걸린 어머니는 정말로 작가의 어머니일까, 만약 그렇다면 어머니가 해준 이야기는 진짜일까, 그것마저 정말이라면 작가가 혼불을 보고나서 죽음을 예견한 이야기는 진짜일까. 이 모든 것들이 아니면, 소설의 ‘나’조차 작가가 아니고 창조된 인물인 걸까. 어디서부터 받아들이냐는 독자의 몫이다. 하지만, 소설의 끝에 이르러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고 그 세계에 살고 있으니까.”(p.132) 라는 마지막 구절은 믿는 사람에게 존재하는 세계의 유의미함을 말해준다.
5. 다시, 소설
그래서, 이 소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중요치 않다. 이 소설이 소설일 수 있는 이유는,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것이 아니라, ‘돌려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필이라면 기억이 사라져가는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이 주제가 될 것이고, 사연이라면 옛날이야기를 불러일으키는 상황이 구구절절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소설로서의 장르를 톡톡히 활용한 주제를 품고 있다. 소통을 전제로 한 이야기가 기억의 상실을 뛰어넘어 세계를 형성하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야기들의 힘은 곧 소설의 힘이 된다. 세상은 멈추지 않고, 이야기도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소설은 믿는 자에게 세계를 들려드린다.
- 2010/11/07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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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게 되는 영화가 있다. 지난번에 봤을 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꼭 끼어있는 영화가 그렇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다시 찾은 영화다. 낭만적이면서도 잔인하기만 했던 그 영화가, 친근하면서도 잔잔한 영화가 되어있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사람이 변하면, 영화도 변한다.
영화의 시작은 츠네오에게서 비롯된다. 그는 유모차를 타고 외출을 나온 조제를 만나게 된다. 조제는 다리가 불편하지만 당돌하다. 할머니 외의 사람과는 거의 접촉할 일이 없는 그녀는 츠네오에게 말을 걸고 싶어 하는 듯 보인다. 책에서 얻은 지식을 은근히 자랑하며 빈정거리는 조제가 왠지 귀엽다. 그는 밥이 맛있다며 자꾸만 조제의 집을 찾아온다. 그러나 그녀를 집안에 꼭꼭 감추고 살아온 조제의 할머니가 츠네오를 막아선다. 조제의 장애는 츠네오가 감당할 수 있는게 아니라며. 그런데도 츠네오는 계속 조제가 신경 쓰인다. 그러던 어느 날, 츠네오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곧바로 조제에게 달려간다.
츠네오는 조제와 함께 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영화는 그들의 행복한 시간을 1년 후-라는 자막으로 처리한다. 이제 직장인이 된 츠네오는 고향집에 내려가는 김에 조제를 부모님께 소개시키고자 한다. 그런데 어쩐지 그의 마음은 점점 불편해진다. 남동생은 진짜 장애인 애인을 부모님께 데려갈 거냐며 형을 걱정 해대고, 오랜만에 길에서 마주친 카나에는 사회복지사가 된다더니 길거리 나레이터모델이 되어있다. 그래도 예정대로 여행길에 오르는데, 멋대로 구는 조제가 이따금씩 성가시게 느껴진다. 조제의 행동은 평소와 다를 바 없지만, 츠네오는 지쳐간다. 그 후 몇 달을 더 함께 살다 그는 조제의 곁을 떠난다.
이렇게 츠네오의 행방만을 따라서 영화를 보다보면 그의 마음이 잔인하게 느껴진다. 달아오르고 식는 것, 만남과 헤어짐의 감정을 2시간 안에 모두 겪어야만 한다는 것이. <여자가 장애가 있었는데, 남자랑 살다가 남자가 떠났어.> 이렇게 무미건조한 한 줄짜리 줄거리로 츠네오의 연애를 요약해버리면 우리는 참으로 할 말이 많다. 여자가 장애가 있으니깐 그럴만하다든가, 남자가 개자식이라든가, 내 그럴 줄 알았다든가. 그렇게 남이 한 연애를 가십성으로 소모해버리면 세상의 모든 사랑은 끝나는 순간 빛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들의 사랑을 가십으로 읽어내는 것은 우리의 시선에 장애가 있기 때문이지, 조제와 츠네오에게 장애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사랑과 사연이 있는 법이다.
이 영화가 사랑을 그려내고 있다고는 하지만, 딱 잘라서 멜로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분류되는 멜로물은 만남을 소재로 한다. 누가 누구를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사랑이 이루어지느냐가 관건이다. 그리고 이루어지는 순간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이 영화의 시작은 이별을 추억하는 츠네오의 독백이다. 게다가 만나서 좋은 꼴 좀 보려고 하면 1년 후로 넘어간다. 영화는 만남보다는 ‘변화’에 집중한다. ‘만남과 헤어짐’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츠네오는 조제의 집을 나오는 길에 차오르는 눈물을 쏟아낸다. 그토록 끌리고 좋아서 만난 조제와의 관계도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결국, 끝났다.
사실, 사랑을 해본 사람에게 츠네오의 모습은 너무도 친숙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면서 한번 이상의 사랑을 한다. 요즘은 태어나기 전부터 계획된 인생의 틀에 맞춰 사느라 어딘가에 뜨거워질 틈조차 사라져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뜨거워진 사람에게 장애가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츠네오 역시 그렇다. ‘밥이 맛있어서’ 조제를 찾아가고, ‘자꾸만 생각나서’ 또 찾아간다. 혼자 둘 수 없어서 조제의 곁으로 가야겠다는 그의 말 역시 카나에에게 하는 변명에 불과하다. 카나에의 말대로 그건 츠네오가 착한 애라서가 아니다. 그저, 카나에가 아닌 조제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호기심과 끌림은 우리 모두에게 익숙하다. 사람의 마음은 변한다. 조제를 만나기전 츠네오의 곁에도 누군가 있었고, 조제를 떠나오는 그의 곁에도 카나에가 있듯 감정은 달아오르고 식는다. 동시에, 만남과 헤어짐도 반복된다. 누군가는 첫사랑을 잊지 못하듯 누군가는 마지막 사랑을 잊지 못하고, 그 모든 사랑이 특별했듯 조제 역시 그 사이 어딘가쯤 위치한 특별한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헤어지는 장면에서 조제가 울면서 츠네오에게 매달리기라도 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조제를 억지로 떼어내든 이미 떠나버린 마음을 붙잡고 얼마간을 더 버티든 츠네오는 그야말로 천하의 나쁜놈이 된다. 그리고 조제 역시 츠네오에게 ‘떠올리면 괴로운 한 때의 사람’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영화가 마지막까지 그들의 사랑과 이별을 담담하게 그려낼 수 있는 힘은 바로 ‘조제가 하는 사랑의 방식’에 있다.
그녀는 사랑 앞에 당당하다. 몸에 흉터라도 하나 있으면 걱정스러운 얼굴로 온갖 부끄럼을 떨어대는 순정만화 속 여주인공과는 달리, 조제는 츠네오와의 첫 키스 후에 “해도 좋아”라며 옷을 벗는다. 사랑의 라이벌 앞에서도 멋지다. 츠네오를 빼앗긴 카나에가 유모차에 앉아있는 조제에게 직접 고개 숙여 뺨을 들이대게끔 만든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도 끝나간다. 결혼을 염두에 둔 여행이 아니겠냐는 친구의 말에 조제는 그럴 리가 있겠냐며 고개를 돌린 채 담배만 피워댄다. 조제는 이미 끝을 예감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츠네오의 눈치를 보거나 작아지지 않는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별여행이 되어버린 상견례여행에서, 그녀는 휠체어를 사자는 츠네오의 말을 뒤로 한채 그의 등에 꼭 붙어 다닌다. 몇 달이 지나고, 츠네오는 떠나간다. 그러나 조제는 울며불며 매달리지 않고, 그를 떠나보낸다. 혼자 남을 끝을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어째서일까.
조제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한달 후, 일년 후』를 소중히 여긴다. 그녀의 이름 역시 책 속의 ‘조제’라는 여자에게서 따 온 것이다. 또 다른 ‘조제’는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시간에 대한 온전한 감각을 갖고 있는 여자이다. 책의 마지막에서 한 때 그녀와 사랑했던 남자가 이미 끝난 사랑과 끝나버릴 사랑에 대한 괴로움을 토로한다. 그러자, ‘조제’가 대답한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돼요. 그러면 미쳐버리게 돼요.” 누군가의 관계를 제대로 맺어본 적이 없는 조제는 ‘조제’에게서 배웠는지도 모른다. 사랑의 짧음과 그것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
우리가 하는 사랑에 있어 진짜 장애는 물리적 장애가 아니다. 비록 조제의 장애가 츠네오를 지쳐가게 만들었을지언정, 그 관계의 끝을 말하는 데 있어 그것은 구차한 변명이 될 뿐이다. 그래서 츠네오는 무엇 때문이라며 탓하지 않고 그저 ‘도망쳤다’고 말한다. 하지만, 조제가 그를 떠나보내는 것은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랑의 시작이 있듯 끝은 온다. 상대를 미워하고, 화를 내고, 눈치를 보고, 모른 체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대로 그렇게 사랑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겪어보지 않은 것을 조제처럼 받아들이지 못한다. 조제는 태어났을 때부터 장애를 안고 살아왔다. 그것을 감추려 하거나, 외면하려 했다면 츠네오와의 사랑에서도 당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외부적인 장애를 겪게 된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처음으로 어떠한 벽에 부딪히게 되면 어쩔 줄을 모른다. 한 번의 연애, 누구 또는 무엇과의 긴밀한 관계가 끝나고 나면 우리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제 두 번 다시 이런 건 안하겠다는 둥, 없이는 못살겠다는 둥, 죽겠다는 둥의 말을 내뱉는다. 밥도 굶어보고, 떼도 써보고, 믿지도 않았던 신에게 기도도 해본다. 그래도 세상은 멸망하지 않고 잘 굴러간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면 깨닫게 된다. 나는 변했고, 변화는 또 찾아온다는 것을. 이전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고안해보고, 세상을 보는 눈도 바뀌고, 그러다보면 예전에 봤던 영화도 예전 같지 않다.
영화가 변하면, 사람도 변한다. 그것이 성숙해져 가는 것이든, 늙어가는 것이든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내 마음이 끌리는 것에 단 한번이라도 뜨거웠던 적이 있다면, 그 끝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해서도 배우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조제는 평소와 같이 생선을 굽는다. 단, 한 점이다. 쿵-하고 무릎으로 내려앉는 소리도 그대로이다. 뜨거웠던 사랑과 담백했던 이별 속에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전동 휠체어를 샀다는 것이다. 혼자가 된 조제는 여전히 그곳에 있다. 그렇게, 계속, 살아간다.
- 2010/10/20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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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영화가 시작된다. 평화로운 여름, 한 가족이 호숫가 별장을 향해 간다. 별장에 도착한 남편과 아이는 호수에 배를 띄우고, 아내는 부엌에서 식사 준비를 한다. 그런데, 이웃집의 사촌뻘 된다는 청년 피터가 달걀을 빌리러 온다. 아내는 달걀을 건네주지만 피터, 자꾸만 달걀을 깨어먹고 묘하게 무례하기까지하다. 가뜩이나 신경이 날카로워지는데 이번엔 폴이라는 청년까지 등장해 사람 속을 뒤집는다. 그때 아이와 함께 들어온 남편, 무슨일이냐며 그만 나가달라고 부탁하는데 폴이 돌연 골프채로 남편을 내리친다. 이미 개에게 써먹어봤다는 말에 아내는 나가서 개를 찾고, 싱글거리며 뒤따라 나가 구경하던 폴, 갑자기 우리에게 찡긋, 윙크를 한다. 영화를 보고 있는 바로 ‘당신’에게.
윙크라니, 착각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희미해질때쯤, 가족을 감금한 폴은 아예 대놓고 당신에게 말을 건다. 그들은 가족 모두를 죽일것이다. 기한은 내일 오전 9시. 당신은 어느쪽에 걸겠는가? 이제, 게임은 시작됐다. 어느쪽이라 할 것도 없다. 무엇하나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가족이 당신이 걸게되는 말이다. 아아, <퍼니게임>은 영화의 탈을 쓴 게임이었구나. 당신은 흥미진진한 기분으로 빠져든다. 그들의 살인이 시작된다. 뭐, 어쩔 수 없지. 한명쯤이야. 이때, 찰나의 기회를 노린 당신의 말이 총을 집어 피터에게 방아쇠를 당긴다. 피터가 쓰러진다. 드디어 당신의 턴이 왔다고 환호하는데, 폴이 급하게 리모콘을 찾는다. 그리고, 되감기 버튼을 눌러 당신의 말보다 더 빨리 총을 잡는데 성공한다.
![]()
<퍼니게임>은 게임의 탈을 쓴 영화다. 게임인 척, 스크린 너머의 당신에게 윙크를 하고 말을 건다. 그리고 당신은 자연스레 참여자가 된다. 하지만, 게임과 달리 당신에겐 조종권이 없다. 영화의 조종권은 온전히 피터와 폴에게 있다. 당신은 그저 살인의 동조자이자 방관자가 될 뿐이다. 사실, 당신은 그것에 익숙할것이다. 영화의 러닝타임에 맞춰 아무 생각 없이 기대서 팝콘을 씹으며 주인공편을 들고, 상대편을 욕하고, 무고하게 죽어나가는 조연이나 엑스트라에겐 관심조차 주지 않는 관객의 역할에. 그런데 이번엔, 가시방석이다. 이 영화는 대부분의 관객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영화의 룰을 어겼다. 관객에게 영화속에서 벌어지는 일의 책임을 지우는 것은 물론, 영화를 보다 졸고, 꺼버리고, 심지어 되돌려 보는 당신의 ‘무례한 권리’마저 폴과 피터에게 넘겨준다.
그들의 룰대로라면 당신은 절대 이길 수 없다. 실오라기 같은 희망에 기대어 죄책감과 불안함으로 러닝타임을 버텨야만 하는 당신에게 최후에 남는 것은, 찝찝한 기분과 ‘두 번다시 이 영화는 보지 않겠다’는 다짐뿐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불쾌함을 안고 스크린앞에서 떠나버린다면 당신은 영화에게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우리의 룰은 현실같은 영화가 아닌 영화같은 현실에 있다. 당신이 영화로부터, 현실로부터 도망친다면 그 세계의 룰은 당신의 손을 영영 떠나고 만다. 영화의 조종권은 그들에게 넘어갔다. 그렇다면, 현실의 조종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현실의 룰을 만드는 것은 누구인가? 우리는 그동안 현실의 러닝타임에 맞춰 아무 생각 없이 기대서 누군가의 편을 들고, 누군가를 욕하고, 무고하게 죽어나가는 세상의 조연이나 엑스트라에겐 관심조차 주지 않는 인간의 역할에 익숙해있지 않았나? 이미, 현실은 시작됐다.
덧) 2007년 감독 본인의 리메이크 작이 있지만, 한번 볼꺼라면 원작을 추천한다. 무엇보다, 섬뜩한 윙크를 하기에 마이클 피트는 너무 이쁘잖아...
- 2010/10/18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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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두명의 셜록 홈즈가 부활했다. 코난 도일 生 ‘그’의 추종자들에게 짝퉁은 사양일 지도 모르지만, 이건 모방이라기보다는 진짜 부활.![]()
2010, 런던, 스마트폰 쓰는 셜록.
지난 여름, 영국 BBC에서 제작한 1시즌 3부작 <셜록>이 방영됐다. 알 사람은 이미 다 알고, 본 사람은 이미 다 봤겠지만 2010년 런던에서 부활한 현대판 셜록은 스마트폰 쓰는 셜록이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든,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든은 제 알바 아니고, 꼭 필요한 정보만 머릿속에 챙겨다닌다는 셜록은 그야말로 스마트폰 홍보대사 표창감. 수많은 범죄수사물 미드와 영화에서 ‘초’과학적 수사를 하는걸 볼때마다, 옛날옛적 셜록홈즈때 비하면 세상 참 좋아졌지 싶었는데. 아아. 강산이 15번즈음 바뀌고 나니(셜록 홈즈는 1854년 생) 범죄도 그만큼 진화하고, 셜록도 그만큼 성숙해졌다는 사실. 현대 정신의학적 진단 상 반사회적인격장애자(본인 자청)의 경험과 관찰에 기반한 두뇌형 추리물을 지금, 여기에서 즐길 수 있다는 건 정말 짜릿한 일이다. 참고로,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 그의 영원한 파트너 왓슨은 블로그하는 왓슨.
1940’, 경성, 김내성의 명탐정 백린.
마찬가지로 여름, 한국 추리문학의 아버지로 지칭되는 김내성의 걸작 시리즈가 새로 묶여 나왔다. 『백사도』와 『연문기담』이 바로 그것. 요즘엔 추리문학이라면 일본이나 미국 작품부터 손이 가기 마련인데, 한국, 그것도 1940년대의 경성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면 어떠하신가. 『백사도』중 번안편이 바로 아서 코난 도일의 <여섯 개의 나폴레옹 흉상>, <붉은 머리 클럽의 비밀>, <얼룩 무늬 끝>을 번안한 것인데, 번안곡도 독자적인 곡으로 사랑받듯 김내성의 번안소설역시 또 다른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그게 또 얼마나 짝 소리나게 바꿔치기를 했는지, 저 세 개의 사건이 각각 <히틀러의 비밀>, <백발 연맹>, <심야의 공포>라는 더 자극적인 제목으로 탈바꿈 한걸 보면 작명센스부터 한번 한국적이다. 당연히 한국이니 셜록 홈즈는 국적까지 갈아치우고 경성의 명탐정 백린으로 부활했는데. “아아, 또다시 하품이 나오기 시작한다. 나의 생활은 이 무서운 하품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칠 따름이다. 긴장한 생활! 아아, 긴장한 생활을 나는 희구한다!” 이런 정신머리쯤되면 셜록홈즈가 환생했대도 믿으려나.![]()
덧2) <셜록>을 셜록홈즈와 비교분석한 영드갤의 타조님 해석판에 감사한 마음을.
덧3) 김내성의 『백사도』와 『연문기담』은 소장가치가 있는 책이다. 특히 그의 문학적 재능이 돋보이는 것은 『백사도』의 괴기편인데, 괴기스러운 경성에 광기 넘치는 이야기가 웬만한 니코틴패치보다 흥분되는 것을.
- 2010/10/16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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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는 피로 시작해서 피로 끝나는 영화다. 초반부의 강한 임팩트를 위해 수미상관피를 고수하는 호러물은 많지만, 색다른 점은 시작하는 피가 생리라는 것이다. 캐리는 학교에서 갑자기 초경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를 따돌리고 무시하는 친구들은 그녀를 놀려대기만 할 뿐이다. 평소 캐리를 감싸던 체육선생은 아이들을 벌하는데, 죄책감을 느낀 수는 남자친구에게 ‘파티에서 캐리의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하는 반면, 더욱 골이 난 크리스는 남자친구에게 ‘파티에서 캐리를 골탕먹일 수 있게 도와 달라’고 한다. 한편, 독자적 사이비 신앙을 가진 캐리의 엄마는 순결을 지켜야 한다며 캐리에게 ‘파티에 가면 모두가 너를 비웃게 될것’이라고 저주한다.
영화의 비극성은 캐리의 초경사건에 대처하는 주변인물들의 연쇄적 행동에서 기인한다. 체육선생은 크리스가 캐리에게 복수를 계획하게 만들고, 동시에 수는 캐리를 음모가 기다리고 있는 파티에 가게끔 한다. 파티에서 수는 크리스의 음모를 발견하지만, 방해하러 왔다고 생각하는 체육선생에 의해 쫓겨난다. 결국 체육선생의 행동은 또 다시 캐리에게 나쁜 결과를 불러일으키는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영화에서 행위의 동기는 중요치 않다. 실제 우리의 인생이 그러하듯 선의는 선의를 낳기도, 악의를 낳기도 한다. 그렇게 의도치 않는 결과들은 캐리와 그들의 운명을 불행으로 이끌고, 영화는 비극의 정점을 향해간다.
크리스의 계획대로 캐리는 파티에서 퀸으로 뽑힌다. 무대위로 올라간 캐리의 행복이 절정에 다른 이 때, 그녀의 머리위로 돼지피가 쏟아진다. 충격을 받은 그녀의 머릿속에는 엄마의 말대로 모두가 나를 비웃는다는 생각뿐이다. 초경 때 생겨난 염력이 분노와 함께 치솟고, 이제 파티는 생리도 돼지피도 아닌 살육의 피로 물든다. 컷 분할을 통해 치러지는 파티에서의 염력 대학살은 단연 이 영화의 백미이다. 퀸이 되는 캐리를 보며 좀 더 토실토실하고 예쁜 배우였으면 하는 바람 또한 이 장면에선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다. 옴폭 패인 커다란 눈과 선명한 광대뼈, 피칠갑으로 축 처진 머리카락과 앙상한 어깨의 씨씨 스페이식은 마치 무덤에서 갓 튀어나와 저주를 내리는 듯한 섬뜩함을 안겨준다.
<캐리>를 조마조마한 호러로 즐길 수 있는 것은 들었다 놨다, 쥐었다 풀었다 하는 감독의 ‘아기자기한 밀땅’ 때문이다. 샤워시간과 체육시간, 파티의 한창 때만 보면 음악까지 유치 발랄한 것이 여느 하이틴 로맨스물을 보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마치 캐리의 마음이 움직이는 리듬과도 같이, 영화는 긴장과 해이사이의 곡선을 그리며 넘실댄다. 때문에 친구들과 어울리며 평범한 여고생이 되고 싶은 그녀의 소망이 좌절될 때 마다 보는사람의 안타까움과 불안감은 커져간다. 밀땅의 진수는 파티의 끝이 아니라 영화의 끝맛을 다지는 관객에게 불현듯 조여 오는데, 아아, 요건 역시 스포일링이 되고 말테다.
P.S/ 스티븐킹의 소설이 원작이다. 원작의 캐리는 통통하긴 하지만, 훨씬 더 음험하다. 브라이언 드 팔마는 염력과 음침함 보다는 소녀를 향한 안타까움에 더 마음이 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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